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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일보>1.굳건히 박힌 식민의 잔재,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글쓴이 :
최고관리자
등록일 :
2020-10-22 13:59:09
조회수 :
1,668회
글쓴이 : 최고관리자
등록일 : 2020-10-22 13:59:09
조회수 : 1,668회
- 기호일보
- 승인 2020.10.22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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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을 선언한 지 101년이 된 2020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포한 ‘독립전쟁의 원년’이며 봉오동·청산리승첩 100주년이 된다.
세계 속에 자랑스러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앞장선 경기지역에는 한말 항일의병과 독립만세운동, 의열 투쟁과 애국계몽·민중운동의 전통이 생생히 살아 있다. 하지만 일본 제국의 잔혹한 식민통치와 친일세력의 잔영이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위례역사문화연구소와 기호일보는 총 10회에 걸쳐 경기도의 일제 식민 잔재 실태와 친일문화, 항일투쟁의 현장을 냉철히 살펴보고 ‘새로운 경기, 공정한 세상’을 향한 성찰과 선양의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연재 이후 경기도 식민 잔재 청산과 독립운동 선양 방안에 대한 학술발표회와 토론회도 마련해 지면을 통해 생중계할 계획이다.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을 부탁 드린다. <편집자 주>
일본 제국의 한국 침략은 1910년 8월 29일 합병조약의 체결부터로 보지만 근대적 살인무기로 경복궁을 무단 점령한 1894년 7월로 보면 해방까지 51년에 이른다. 1869년 홋카이도와 오키나와에 이어 1895년 타이완을 무력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반도를 대륙 진출의 디딤돌로 삼기 위해 치밀한 침략계획을 세워 실행해 나갔다. 만대로 이어갈 식민지의 통치를 위해 그들은 행정구역 개편과 토지조사사업, 철도 부설 등은 물론 조선사 편찬과 신사참배, 일본어 상용 등 정신 분야까지 적극 통제하려 했다. 그 중 역점을 둔 사업이 ‘충량한 제국 신민의 육성’이니, 곧 친일파 양성과 식민사관 전파라 하겠다.
해방 75주년을 맞은 오늘날에도 일본 제국이 심어 놓은 식민통치의 흔적과 잔영은 불행히도 우리 곁에 굳건히 남아 있다.
그것도 시청이나 구청·읍면사무소·주민센터, 경찰서와 학교 등 관공서의 건축물을 비롯해 공원이나 마을회관 등 공공시설 앞의 기념비석, 대학교 내 동상·흉상 등으로 뿌리 박혀 있다. 나아가 초·중등학교 교가나 교훈·교과서를 비롯해 마을 이름이나 지명·도로명 등으로 생생히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일일이 헤아리기 힘든 우리 곁의 식민 잔재 중 일본 제국의 침략을 찬양한 대표적인 식민 잔재 기념물의 일부를 소개한다.
# 송병준·종헌 부자 친일 찬양 기원비 용인 ‘팔굉일우’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 거두로 불리는 송병준(1858~1925)은 1890년부터 4년간 용인 양지현 현감을 지낸 인연으로 추계리 일대 33만여㎡의 터에 99칸짜리 별장을 지었다. 산 능선을 따라 크고 높은 담장을 쌓은 그는 일진회원 400여 명과 일본군 50여 명을 상주시켜 통치에 저항하는 농민과 의병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죽였다. 대저택에 영화지라는 연못을 지어 총독부 관료들과 친일인사들을 불러 만찬을 자주 열었다.
송병준은 1907년 고종 황제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자 도쿄에 가서 사죄하든지 일본군사령관에게 자수를 하라고 협박했다. 한일강제병합에도 앞장서 자작 작위와 은사금 5만 엔을 받은 그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는 공작금으로 5만 엔을 챙기기도 했다. 총독부는 그의 혁혁한 공적을 기려 수원∼여주 협궤철도에 추계역을 추가로 만들어 전용하도록 배려했다. 1925년 2월 송병준이 숨지자 일본 천황은 포도주 12병을 내려 조의를 표했고, 욱일동화대수장을 추서했다.
그의 많은 재산과 백작 작위는 장남인 송종헌(일본명 野田鍾憲, 1876~1949)에게 물려졌다. 대를 이어 중추원 참의를 지낸 송종헌은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간 국민총동원연맹의 이사를 맡았다.
2008년께 양지초등학교 운동장 앞 도로공사 도중 교문 옆에 묻혀 있던 송병준 영세불망비가 발견됐다. ‘송종헌 백작 영세기념비’도 발견됐는데, 1927년 4월 작위수여를 기념해 만든 비석이다. 또 ‘팔굉일우(八紘一宇) 종3품백작 야전종헌 근서’라 쓴 비석도 찾았는데, 1941년 9월 송종헌이 일본 제국의 사상을 세계 만방에 펼치자고 전쟁을 선동하며 새긴 것이다. 현재 용인문화원에 소장돼 있는 이 기념비석들은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 매국노들의 씻을 수 없는 흔적이 아닐 수 없다.
# 일본인 경기도지사와 동양척식회사 치적을 담은 수원 ‘치산치수비’
정조 임금의 효와 애민사상을 볼 수 있는 노송지대와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시 파장동 한국농어촌공사 맞은편 길가에는 높이 2.4m, 너비 35㎝의 거대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치산치수비(治山治水碑)’란 낯선 글씨체 옆에 ‘경기도지사 감자의방(甘蔗義邦) 서’라 새겨져 있어 칸쟈 요시쿠니 당시 경기지사가 썼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황폐하고 홍수 피해가 큰 수원지역을 안타까워 한 조선총독부가 동양척식회사와 농사주식회사, 조선인 지주의 도움을 받아 광교산 일대 임야에 사방공사와 식수 조림을 행하고 서호 입구에 이르는 제방을 축조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39년 6월 일왕사방림시업조합을 결성하고 사업의 완성을 감사하는 뜻으로 장두병이 비문을 쓰고 당시 일왕(日旺)면장 광길수준이 비를 세웠다고 적었다.
문제는 ‘식민지 농업사를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라는 작은 안내판에도 불구하고 이 비석이 일제의 지속적인 토지와 삼림 수탈 사실을 보여 주기는커녕 식민통치를 정당화시키고 감사의 마음을 대대로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석의 내용이나 식민사적 의의를 밝힌 자료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관보나 언론 보도에서조차 "동양척식회사의 도움을 받아 치산치수의 업적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문화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하고 있어 반성과 청산의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 경기도평의원 박필병의 동상과 ‘시혜불망비’
안성시 한복판에 자리한 국립한경대학교 정문을 지나면 곧장 8m 높이의 거대한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안성 출신의 대부호이자 기업인 박필병(1884~1949)이 동상의 주인공으로 한경대의 전신인 안성농업학교의 설립자다. 하지만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705인 중 한 사람이다.
1920년대 면협의회원으로 시작해 1927년 경기도 도회의원을 역임한 박필병은 1933년 경기도회의원에 당선됐고, 1939년 사재를 털어 안성농업학교를 세웠다. 이어 1941년 9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됐는데, 이를 기념하는 축하회를 겸해 그의 동상을 안성농업학교에 세운 것이다.
다만, 이 동상은 1943년 5월 아들 박용복(일본명 松井秀浩)에 의해 일본군에게 헌납됐다. 현재의 동상은 안성농대 동창회에서 1980년 5월 ‘선생님의 고귀하신 모습’을 복원해 새로 세운 것이다.
인재 육성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국민훈장 목련장이 추서된 박필병은 그러나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사기관총 구입비와 비행기도 헌납할 정도로 적극적 친일인사다. 안성시 낙원동 낙원역사공원에는 일본 제국에 충성하면서 지역에 기여한 그의 공을 기려 ‘경기도평의원 박필병 시혜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그 현장은 1949년 9월 죽기 직전까지 참회 없이 친일의 영화를 누린 그의 은덕을 기리기보다 결코 닮아서는 안 될 반면교사의 교육장으로 되살아나야 할 것이다.
<글·사진=김명섭(단국대학교 연구교수, 한국독립운동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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