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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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의 독립운동가들
[해외독립운동]
오희영(1924~1969), 신송식(1914~1973)부부
글쓴이 :
최고관리자
등록일 :
2019-01-06 13:07:16
조회수 :
3,957회
글쓴이 : 최고관리자
등록일 : 2019-01-06 1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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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영지사와 신송식지사 부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있는 오희영,신송식지사 부부의 묘
충칭 임시정부 시절 단체 사진 속 오희영지사
* 요약
오광선 장군의 장녀인 희영(姬英, 1924~1969) 은 길림성 액목현에 태어나 어머니를 따라 남경에서 살았다.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여 적의 기밀을 탐지하고 탈출학병을 모집하는 초모역할을 담당했다.
1940년 한국광복군에 가담하였고, 광복군 간부인 신송식(申松植,1914~1973)과 결혼해 서안에서 활동했다.
백범 김구 주석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 상세
- 신송식
1914년 3월 4일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면 남단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중국으로 건너가 1926년 상하이에서 병인의용대 활동에 참여하였고, 1933년 광둥정치군사학교를 졸업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 당원이던 1938년 10월에는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여하였다.
1943년 5월, 김학규의 지시로 김국주·전월성 등과 함께 장쑤성 쉬저우의 중국군 유격대사령부로 밀파되어 적 후방공작을 전개하였다. 중국군 유격부대의 협력 아래 한인 청년과 일본군 내의 한적 사병에 대한 초모공작을 추진하며, 이들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1944년에는 일본의 「학도동원령」 등에 따라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장준하·김준엽·노능서 등 학도병 30여 명이 쉬저우의 일본군 쓰카다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하며 초모활동은 한층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44년 임정요인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던 토교에서 한필동 목사의 주례로 신송식과 혼인식을 올렸다.
1945년 6월 임시정부에서 부부가 함께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충칭에 남아 교포들의 귀국을 도왔다. 1946년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전원위원에 임명되어, 현지 한인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귀국을 돕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오희영
1924년 4월 23일 중국 지린성 액목현에서 부친 오광선과 모친 정현숙 사이의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이다. 그녀는 15살 때인 1939년 한국광복진선 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해 연극을 통한 선전활동에 관여했다. 이후 충칭에서 충칭시립 중학교에 다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뒤 여기에 입대했으며, 1942년 4월 제3지대 징모처제6분처라는 명칭아래 안휘성 부양으로 떠났다.
징모제6분처도 안휘성 부양에 근거를 두고 대적 각종 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녀는 오광심, 지복영, 신송식 등과 함께 일본군에 강제 동원된 한인들을 초모하는 공작 활동을 수행했다.
1944년에는 부양에서 군사 교육 훈련을 마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단의 1기 졸업생들과 함께 신송식 교관의 인솔하에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는 충칭으로 가서 한국독립당에 가입했다. 또한 중경 임시정부 주석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4년 임정요인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던 토교에서 한필동 목사의 주례로 신송식과 혼인식을 올렸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선전 활동을 하던 오희영과 그 가족은 해방을 맞아 다른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충칭에서 배를 타고 양자강을 내려와 난징에서 기차로 갈아타고 상하이로 간 후, 상하이에서 귀국선을 타고 부산을 경유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 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9년 2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오희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4년 그녀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